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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김선영, 뮤지컬 외길 25년 내공..새삼스럽지 않다

  • 입력 2023.09.05 11:38
  • 수정 2023.09.05 12:48
  • 기자명 이은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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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예투데이뉴스=이은진 기자] “뭘 하든, 쓸데없는 기대를 너무 크게 그리지 말자는 게 있어요. 이건 제 성격도 좀 있는 것 같아요. 일어나지 않은 것, 지나간 것을 자꾸 생각하면서 잔소리하지 말자. 지금 나한테 주어진 것을 일단 하자, 그게 우선이고 급선무죠. 다만 욕먹지 말자는 마음은 진짜였어요(웃음).” 앞서 종영한 JTBC 토일드라마 '킹더랜드'에서 구화란 역으로 베테랑 뮤지컬배우의 내공을 입증한 김선영의 이야기다. 1999년 뮤지컬 '페임'으로 데뷔한 25년 차 배우가 연기 인생 처음으로 다른 환경에 도전했던 겸손이다.

JTBC '킹더랜드'는 정통 로맨틱 코미디로, 이준호, 임윤아의 눈부신 비주얼 케미에 힘입어 초반부터 가파른 상승세를 탔다. 방영 중 10%대 높은 시청률은 물론 드라마 화제성, 드라마 출연자 화제성을 싹쓸이했고,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에 이어 넷플릭스 비영어권 1위를 차지하는 등 국내외에서 크게 주목받았다.

김선영은 방송 말미, 여름 휴가차 가족과 해외여행을 다녀왔는데 아직 방송이 끝나지도 않은 와중에 어디서나 알아보고 인사를 건네는 이들이 많아 요즘 정말 세계가 실시간이구나, 한국 콘텐츠에 이렇게 관심이 많구나글로벌 시대의 위엄을 실감했다고 한다.

로맨틱 코미디는 1990~2000년대 중반까지 안방극장을 대표한 장르다. 1992년 최수종, 최진실 주연의 '질투'가 본격 트렌디 드라마 시대를 열면서 가벼운 로맨틱 코미디가 쏟아졌다. 모두가 힘들던 경제 위기 속 현실판 백마 탄 왕자와 평범한 여성의 '묻지마 해피엔딩'은 나름 시청자의 대리만족이었다. 이후 사회적 흐름에 따라 로맨틱 코미디도 여성 주도적 성향이 강해지고, 판타지나 스릴러를 결합하는 등 복합장르로 진화했는데, 2023년의 '킹더랜드'는 다시금 정통 로맨틱 코미디를 선보였다. 남모를 상처를 지닌 재벌 2세 남주인공, 능력과 성실함이 무기인 '오뚝이' 여주인공, 싸가지 재벌 2세 옆 '산초' 같은 비서, 흙수저 여주인공 옆 흙수저 친구들, 이복형제들의 경영권 다툼 등 그야말로 클리셰의 향연이었다.

사진=JTBC '킹더랜드' 스틸 / 제공=앤피오엔터테인먼트, 바이포엠스튜디오, SLL
사진=JTBC '킹더랜드' 스틸 / 제공=앤피오엔터테인먼트, 바이포엠스튜디오, SLL

그런데, '킹더랜드'에는 유독 색다른 맛이 있었다. 바로 남주인공 구원의 이복 누나 구화란이다. 이를 엄밀히 말하면 구화란을 연기한 배우 김선영이다.

구화란은 주인공의 삶과 사랑에 장애물이자 극의 최대 갈등 요소로, 역시나 빤한 '빌런'이다. 이 경우 대부분 연예인 뺨치는 스모키 화장에 두어 시간은 말았을 법한 웨이브 펌, 킬힐을 기본 장착한 화려한 스타일로 겉모습부터 센 캐릭터를 강조해왔는데, 김선영의 구화란은 달랐다. 깔끔한 생 단발 헤어와 단정한 의상에서 워커홀릭이 묻어났고 동시에 고급스러운 기품을 풍겼다. 특히, 90년생 이준호와 실제 16살 차여서 구화란이 구원을 뼛속부터 애송이로 여기는 특유의 태도가 이렇듯 매력적일 수가 없다. 평소 김선영의 열혈팬이었다는 임현욱 감독의 캐스팅 의도가 이것이었으리라. 방송 초반, 이모 같다는 일부 평도 있었으나 실상 이 또한 '남매=또래'라는 선입견일 뿐이다. 회를 거듭할수록 김선영의 구화란은 그를 능히 설득했다.

캐스팅을 해주신 건 정말 감사한데, 앞뒤 캐스팅이 너무 차이가 있으니까. 아버지가 연배가 있으신 분이면 그래도 좀 편할 수 있겠는데, 저랑 띠동갑이신데 심지어 동안이셔서..(폭소). 나이 차가 큰 이복 남매라 해서 그나마 오케이 하고 갔는데, 굳이 왜 나였을까, 저도 의문이긴 했어요. 나에게 원하시는 게 뭘까. 심플하게는 그동안 많은 드라마에서 보여준 재벌가 사람들의 이미지가 있으니, 조금 다른 색깔로 그려지려면 시청자가 모르는 혹은 좀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어줄 누군가가 필요하셨던 게 아닌가. 그래서 감독님이 전형적인 연기를 원하시지도 않았고, 중후반까지도 구화란이 대놓고 발톱을 드러내는 걸 꺼리셨고, 연출의 의도라면 그런 거였어요. 그런데 사실 대본만 보면 '근본도 없는 게 어디서 건방을 떨어', '나가', '꺼져', 얼핏 참 쉽고 빤하잖아요. 그런데 발톱은 드러내지 말라. 사실 저한테 되게 가혹한 걸 원하신 게 아닌가(웃음).”

그 하나의 주문 외에, 구화란의 캐릭터성이나 연기 방향에 관해서는 별다른 언급이 없었다고 한다. 베테랑 배우 김선영을 믿었기 때문일 것이다. 김선영의 남다름은 뮤지컬 최근작 '하데스타운'의 페르세포네나 '데스노트'의 렘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사진=뮤지컬 '하데스타운' 캐릭터 포스터 / 제공=에스앤코
사진=뮤지컬 '하데스타운' 캐릭터 포스터 / 제공=에스앤코
사진=뮤지컬 '데스노트' 스틸 /. 출처=오디컴퍼니 SNS
사진=뮤지컬 '데스노트' 스틸 / 출처=오디컴퍼니 SNS

'하데스타운'의 페르세포네는 소위 팜므파탈 캐릭터로 그리기 딱 좋은 인물이다. 장르 특성상 '튀어야 산다'는 식의 과함이 흔한데, 김선영의 페르세포네는 그 흔한 욕심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자 뮤지컬치고는 지극히 드라마밖에 없는 주인공들이 살고, '하데스타운' 특유의 연극적 연출 요소들까지 하나하나 눈에 들어온다. 특정 캐릭터로 과하게 시선이 쏠리지 않으니 밸런스가 조화롭고, 극 전체를 여유롭게 즐길 수 있는 것이다.

또한, '데스노트'의 렘은 느릿한 손짓, 말투, 걸음걸이에서부터 항상 무언가 바쁜 인간계와는 다른 존재라는 것을 직관적으로 보여준다. 주요 인물 4인 중 분량이 극도로 적음에도 존재감은 압도적이었다. 그런데 이조차 홀로 넘치지 않는다. 특히 배우는 분량의 많고 적음을 떠나 '어떻게 존재하느냐'에 따라 배우의 클래스를 증명한다 해도 과언이 아닌데, 2008년 '씨왓아이워너씨'에서부터 시작된 '여왕'이라는 애칭이 뮤지컬 팬들에게 지금까지 김선영을 대표하는 수식어로 불리는 진짜 이유가 그것일지 모르겠다. 배우 장사로 통하는 한국 뮤지컬 시장에서 '나'보다 '작품'을 우선하는 배우가 사실 흔지 않다. 그중에도 김선영은 단연 독보적이다.

'킹더랜드' 역시 김선영의 존재감을 빼고는 성공을 논하기 어렵다. 아무리 주인공들이 날고 긴대도 그들을 받쳐주는 조연의 역할이 마땅치 않고서는 16부작 긴 호흡에 동력이 떨어진다. '킹더랜드' 이후 방송된 여러 로맨스물이 별다른 힘을 쓰지 못한 이유가 대부분 그러했다. 로맨틱 코미디의 대가 김은숙 작가의 경우 '시크릿 가든', '상속자들', '태양의 후예', '도깨비' 등에는 서브 주연의 절절한 로맨스를 첨가했고, '미스터 션샤인', '더 글로리'는 캐릭터성 강한 조연들이 탄력을 더하는 식으로 성공 방정식을 이어가고 있는데, '킹더랜드'는 갈등 요소라고는 구화란 하나다. 아무렇지 않게 독설을 뱉으면서도 기품과 카리스마를 장착하고 있으니 구화란이 분명 '빌런'이긴 할 텐데 진짜 나쁜 사람인지 아닌지, 오묘한 긴장이 흐른다. 그 존재감만으로도 드라마 상승세에 큰 조력이 되었음은 자명하다.

사진=JTBC '킹더랜드' 스틸 / 제공=앤피오엔터테인먼트, 바이포엠스튜디오, SLL
사진=JTBC '킹더랜드' 스틸 / 제공=앤피오엔터테인먼트, 바이포엠스튜디오, SLL

시청자에게 이미 익숙한 재벌가 배다른 남매 이미지가 있는데 이미 준호 씨하고 나이 차도 많아서, 그냥 연기나 잘하자, 여기에만 집중하자 했고, 그런 대사들이 나에게서 어떤 식으로 나올까? 그것조차도 구체적으로 계획하지 않았어요. 되도록 구화란의 서사에 집중했죠. 지금의 구화란이 있기까지, 어려서 부모에게 딱히 정서적인 교감이나 교육을 받은 적이 없는, 오로지 아버지에게 어떻게 보여야 생존할 수 있을지를 스스로 터득하면서 살았던 인물인 것 같은 거예요. 나는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따뜻함 속에 살아온 동생의 인생을 보면서 어떤 미움, 분노, 억울함, 피해의식, 열등감이 켜켜이 쌓였을 것이고, 그래도 영특하고 능력은 있고 아버지한테 배운 게 있으니 성과도 내면서 그룹은 잘 이끌어온 것 같고, 그런 것들이죠. 그나마 성과가 있어야 칭찬이라도 받는 것 같으니 성과에 집착하면서도 내가 세운 경영 철학에 관해서는 에티튜드가 정확해야 한다고 생각했고요. 그러다 한심하게 여겼던 동생에게 아버지의 태도가 차츰 바뀌면서 구화란에게 균열이 생기게 되고, 스스로 제어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 결국 발톱을 드러내게 되는, 그래서 초중반에 구화란이 어떻게 보이는지가 되게 중요했던 것 같아요. 그걸 감독님도 원했던 것 같고, 저도 그게 맞다 생각했죠.”

그리고 너무 튀면 안 되니까. 어쨌든 드라마에 잘 녹아야 하는데, (구화란) 역할도 센데 그동안 제가 에너지가 강한 역할을 많이 하기도 해서, 장르가 로맨틱 코미디인데 혼자만 산으로 갈까 봐. 그런데 감독님이 워낙 중심을 갖고 가는 분이어서, 혹시 문제가 있었다면 감독님이 잡아주셨겠죠. 그렇게 믿고 갔어요.”

해서 안타까운 점은, 오히려 대본이 그런 김선영을 품기에 역부족이었다는 것이다. 김선영을 통해 그토록 매력적인 구화란이 만들어졌으나 구화란을 통한 갈등은 끝내 또다시 닳고 닳은 클리셰였다. 아랍 문화 왜곡 논란은 복병이었을 뿐, '킹더랜드'가 줄곧 높은 화제성과 시청률을 자랑했음에도 어쩐지 뒷심이 부족했다고 느껴지는 것은 실상 그 때문이다. 겉으로는 회사를 위해 구원과 천사랑의 관계가 공개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면서도 뒤로는 반드시 공개하라고 사주하는 식이다. 구화란이 유니크한 캐릭터성을 상실한 자리에 재벌남 정략결혼 카드가 등장하고 이별 위기 끝에 '어쨌든 해피엔딩'이니 딱히 흥미 둘 바가 없다. 극 후반 텐션이 느슨해진 결정적인 이유다. 구화란을 직접 연기한 본인이야 말로 아쉬울 법 하건만, 배우는 배우일 뿐오히려 민폐는 되지 말자 했다고 한다.

아쉬움이 있느냐? 보시는 분들은 그럴 수 있다고도 보는데, 저는 배우니까 작가님이 주신 대본을 충실하게 표현하는 게 제 역할이었고요. 마지막 촬영 때 감독님이 방송 공개되면 여러 반응이 있을 텐데 어떠시냐고 막 기대에 차서 물어보셨는데, 그때도 저는 그냥 민폐만 끼치지 말자고, 감독님과 마지막으로 그런 이야기를 나누고 촬영을 끝냈거든요. 그런데, 대본 보면서 사실 좀 재밌긴 했어요. 구화란이 일 좀 치려고 하면 뭐가 이렇게 금방금방 해결되고, 천사랑 때문에 해결되고, 얻어걸려 해결되고 하니까(웃음), 구화란이 참 억울하겠다는 생각을 하긴 했어요. 준호 씨하고도 '내가 뭔가 일은 벌이는데 되게 쉽게 정리하더라' 하니까 막 웃더라고요. 구원이는 이게 자기 복인가 보다 했죠.”

아쉬움은 아쉬움 대로, 김선영의 첫 드라마는 성공적이었다. 오로지 뮤지컬 한 길만 20년을 넘게 해온 배우가 특별출연 경험도 없이 단번에 16부작 드라마에 주조연급으로 출연해 작품의 완성도와 성과를 높이고, 배우 개인으로도 호평을 얻은 사례는 매우 이례적이다. 언뜻 '슬의생'의 히로인 전미도를 떠올릴 수 있겠으나 뮤지컬 외길은 아니다. 최근 주목 받은 김히어라 역시 많은 단역을 거쳐 '더 글로리'에 이를 수 있었다.

임현욱 감독의 러브콜로 성사된 깜짝 출연이지만, '뮤지컬 여왕' 김선영을 아는 이들에게는 그의 활약이 딱히 새삼스럽지 않다. 다만, 전 국민을 대상으로 하는 방송 콘텐츠에 처음 도전한 만큼 자칫 묵묵히 쌓아온 커리어에 흠집이 날 수 있는 상황. 그러나 김선영은 일어나지 않은 일에 먼저 기대도 걱정도 말자는 주의라고 한다. 그렇게 정통 로맨틱 코미디의 케케묵은 클리셰 하나가 폼나게 부서졌다.

저는 이번 드라마뿐 아니라 뭘 하든, 쓸데없는 기대를 너무 크게 그리지 말자는 게 있어요. 이건 제 성격도 좀 있는 것 같아요. 일어나지 않은 것, 지나간 것을 자꾸 생각하면서 잔소리하지 말자. 지금 나한테 주어진 것을 일단 하자, 그게 우선이고 급선무죠. 다만 욕먹지 말자는 마음은 진짜였어요(웃음). 그리고 민폐 끼치지 말자. 작품할 때도, 뭔가 선배가 너무 꼰대처럼 보이는 것도 어떨 땐 좀 자존심 상하고, 멋있게 보이려면 그냥 내 할 일 잘하자는 게 있어서, 어떻게 보면 되게 심플해요. (성과를) 미리 상상하는 건 그 자체가 되게 오버라는 생각이 들어서, 어차피 내가 선택했고 그래서 받는 평가라면 좋든 나쁘든 내 모습이니 그것 또한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했고, 물론 당황스러운 순간도 있긴 해요. 그럴 땐 또 담담하도록 노력해보자는 생각을 하는 거죠. 사실 얼떨결에 시작했지만, 감사한 상황이잖아요. 내가 막 하고 싶다고 할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정말 감사하게도 저를 데려가 주시는 상황이 됐고, 너무나 배려를 많이 해주셔서 그 덕에 용기를 낸 것도 있었죠.”

배우 김선영의 인터뷰, 2편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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