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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사들의 노력으로 지켜낸 또 한 곳 삼척 월천

  • 입력 2012.05.13 12:55
  • 기자명 유형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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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김승옥의 소설 “무진기행(霧津紀行)”이 떠올랐다. 그 소설에서 소개하고 있는 무진은 안개 낀 도시이다. 이 안개는 소설의 분위기를 이끌어가는 중요한 소재다. 내가 읽은 무진기행의 텍스트에는 안개가 자욱하게 끼어있었다.

서울에서 무진으로 내려온 '나', 전보를 받고 다시 서울로 향하는 '나', 무진에서 만난 여자 '인숙', 여자를 사랑하는 후배 '하', 세무서에서 일하는 '조' 등등. 무진과 서울과의 연결고리 그리고 무진과 서울, 자신의 삶에서 만난 인물들이 연결된다. 무진에서 만난 사람들을 보면서 무진의 안개와 같이 찝찝하고 음습한 느낌을 많이 받았다.

안개처럼 뿌옇고 분명한 책임도 없이 삶이 이루어지며 그래서 미칠 것 같은 분위기를 자아내는 '반근대적'인 무진이지만, 이곳이 한정된 책임 속에서 살아가는 분명한 도시 '근대'의 서울보다는 아직 인간적인 사랑을 머금을 수 있다는 것이, 그렇지만 우리의 주인공이 서울을 벗어날 수 없는 운명에 이미 처해졌다는 것이 내 맘에 많이 각인 되었던 것 같다.

서울서 길을 나선지 3시간, 대관령터널을 지나기 전부터 약간의 안개가 시야에서 흩어졌다 모이곤 했는데 터널을 나오자마자 캄캄한 장벽이 앞을 가로 막았다. 꼭 비행기를 타고 구름속을 지나는 것과 같은 기분으로 비상등을 켜고 서행을 하며 계속 터널을 지나 강릉으로 차를 내 달렸다. 안개는 비처럼 차를 적시고 그 속에 들어 있는 우리들 마음까지 눅눅하게 만들었을 즈음 뜬금없이 무진기행이 떠올랐다.

아마 무진(霧津)도 이렇게 지독한 안개가 끼었을 거라 추측이 되는 것은 제목이 주는 의미도 있겠지만, 어깨 쳐진 눅눅한 ‘나’의 눅눅한 마음의 뉘앙스가 무진이라는 곳의 일기를 추측할 수 있었을 뿐이다. 지금 나는 일탈을 꿈꾸며 숨통 막히는 번잡한 서울을 떠나고 있어서가 아닌 단순한 여행일 뿐인데도 말이다.

강릉 휴게소에 차를 세웠다. 하늘은 구름이 가득하다. 안개 속을 뚫고 와서 갑자기 피곤이 엄습해와 잠시 잠을 청했다. 잠깐 일 뿐인데 너무 잠들었나 보다. 밖은 이미 동이 터오고 있었다. 다시 차를 몰아 삼척으로 방향을 틀었다. 가는 중에 바다를 조망하니 구름 낀 바다 위가 붉게 물이 들어왔다. 해가 뜨고 있는 것이다.

삼척에서 다시 원덕 방향으로 호산교차로에 다다르니 눈에 익은 도로가 보인다. 2년 전 무턱대고 가 봤기 때문에 기억이 어슴푸레 떠올랐다. 차를 주차하고 내려 보니 죽다 살아난 섬이 보였다.

 

강원도 삼척시 남쪽 끝자락인 원덕읍 월천리 '솔섬'(속섬이라고도 함)이다. 그 섬이 세상에 처음 알려진 때는 지난 2007년 영국의 사진작가 마이클 케냐(Michael Kenna)가 흑백사진 한 장을 공개한 후였다. 그가 찍은 사진의 솔섬은 바다가 숨을 삭이던 푸르스름한 새벽녘이었다. 신비로운 느낌의 그 사진에 대한민국의 사진가들이 깜짝 놀랐다.

 

솔섬이 유명해진 그 즈음. 삼척시와 한국가스공사가 호산해수욕장을 중심으로 한 원덕읍 일대에 LNG저장기지를 건설하기로 발표했다. 그대로라면 소나무 숲이 멋스런 그 섬이 사라질 운명에 놓이게 된 것이다. 그 사실이 알려지자 너도 나도 카메라를 들고 몇 년 후면 사라질 풍경을 담기위해 그 섬으로 향했다. 그 즈음 나도 카메라 들고 솔섬으로 향했었다. 별빛이 흐르는 아름다운 숲, 달빛이 고즈넉한 섬, 불타는 하늘을 품은 섬 등 온갖 찬사가 인터넷을 달구기 시작했다. 결국 삼척시와 한국가스공사는 그 섬이 훼손되지 않도록 뒤로 물러나 저장기지를 건설키로 했다. 죽을 뻔했던 솔섬이 사진가들에 의해 되살아난 셈이다.

 

오늘 그곳에 다시 카메라를 들이댔다. 하늘은 금방이라도 비를 뿌릴 듯한 구름들이 드라마틱하게 하늘을 수놓고 있지만, 공사로 인해 어수선한 환경으로 카메라 앵글은 옹색하게 변했다. 그나마 이렇게라도 보전이 된다니 그나마 다행이 아니랴?

사진을 촬영 후 우리는 7번 국도를 타고 낭만가도를 달렸다. 낭만가도(Romantic Road). 고성에서 시작해 속초와 양양, 강릉, 동해를 지나 강원도 남쪽 끝 삼척까지 총거리 240㎞.

로마로 향하는 길의 27개 중세(中世) 도시를 따라 340여㎞의 관광루트를 만든 독일의 낭만가도를 벤치마킹했다는데, 왜 낭만가도라 명명했는지. 낭만(浪漫)은 감정적이고 이상적으로 사물을 파악하는 심리적 상태를 말하는데 Roman을 차음해서 낭만이라 했다니, 다른 이름으로 명명했으면 좋았을 텐데 하는 생각을 하는 차에 갈남리에 다다랐다.

 

갈남리 신남마을에는 풍랑에 휩쓸려 안타깝게 목숨을 잃은 처녀를 위로하는 작은 사당인 해신당이 있다. 억울한 처녀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하여 남성의 성기를 본딴 나무 조각을 매년 정월대보름과 10월 첫 번째 오(午)일에 조각하여 바치며 정성스럽게 성황제를 지낸다. 그곳에 공원을 만들었다. 예술과 외설사이를 아슬아슬하게 오간 공원, 그곳에서 보는 바다는 더욱 웅장하고 아름다웠다.

 

다시 길을 나서 장호항을 조망할 수 있는 가로 공원에 차를 댔다. 시원한 바람이 가슴가득 안긴다. 수십길의 절벽 아래로는 장호항 전경의 모습이 경쾌하게 두눈으로 달려든다. 잠시 끓여온 커피를 꺼내 호사를 누려 본다.

 

다시 맹방해수욕장을 지나 두타산 기슭의 미로면 천은사로 향했다. 가는 빗줄기가 수줍게 차창을 노크한다. 천은사에 가까이 가니 아름드리 느티나무들이 도열을 한다. 평균 수명 250년, 근데 왜 나무 나이를 측정해 팻말을 붙이는데 작년에도 250년, 올해도 250년, 내년에도 250년이 될 텐데 나무는 나이를 안 먹나? 하는 엉뚱한 생각을 하며 차 문을 여니 여긴 아까 바다와 다른 나무냄새 가득한 향기가 코끝을 자극한다.

 

우산을 받쳐 들고 천천히 걸어 올라갔다. 소리 없이 이슬비는 가슴속으로 촉촉이 스민다. 고요한 정적에 사로잡혔던 산사가 예불소리로 수선스러워졌다. 극락보전을 우측으로 돌아 삼성각의 가파른 계단을 오르니 빗속에 몸을 감췄던 천은사 경내와 비에 젖은 숲속이 기지개를 켜고 있고 정중앙에 층층나무가 하얀꽃을 피워 군계일학으로 뽐내고 있었다.

 

천은사는 1598년에 휴정(休靜)이 중건할 때, 절의 남서쪽에 있는 봉우리가 검푸르다고 해서 절 이름을 흑악사(黑岳寺)로 바꾸었다. 1706년에 화재로 소실된 것을 이듬해 중건하였다. 1899년 인근에 태조의 4대조인 목조(穆祖)의 능을 만들고 이 절을 원당사찰로 삼았으며, 절 이름을 현재의 천은사로 바꾸었다. 1950년 6·25전쟁으로 소실되었다가 1976년 중창하여 오늘에 이른다.

 

태백쪽으로 차를 돌려 매봉산을 오르고 서울로, 서울로 긴 귀경길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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