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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백 설원의 덕유산을 오르다

  • 입력 2012.02.10 16:21
  • 기자명 푸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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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안개속의 풍경이 있다. 그리스 영화의 거장 테오도로스 앙겔로플로스가 감독한 영화이다.  어쩌면 암담했던 그리스의 현실을 표현 한 것 마냥 꿈도 희망도 없는 남매가 독일에 있다는 아버지를 찾아가는 과정에서 온갖 역경을 겪어 가며 마침내 국경을 따라 흐르는 강을 건너 안개 자욱한 길을 걸어가는 쓸쓸하고 황폐한 여정을 담은 영화이다.

덕유에 올라 보니 갑자기 그 영화가 생각이 났다. 안개만이 자욱한 덕유산을 여름에 한번, 겨울에 한번 걷고 있다.가끔가다 마주치는 겨울의 혹독한 바람은 옷 속을 파고들어 심장까지 얼어붙게 만들고습한 겨울의 안개는 폐부에 파고들어 잊고 지낸 천식까지 다시 상기를 시킨다.

설악의 겨울바람은 망치와 같다. 한번 얼굴에 맞으면 띵하고 골이 울릴 정도로 정신이 몽롱해지지만, 덕유산의 겨울바람은 바늘 끝과 같아서 사정없이 살을 후비고 들어선다. 하지만 그 바늘 끝과 같은 바람은 중독성이 있어서 한번 맞아본 사람은 매년 겨울이면 생각이 나 다시 덕유산을 찾는 가 보다.

 

설천봉에 오르니 사위가 잠잠한데 귓전을 때리는 바람소리만이 기괴한 울음소리마냥 몸을 싸고 산 저편으로 내닫는다. 카메라를 꺼낼 엄두조차 못 내고 이내 향적봉으로 발을 옮긴다. 길은 이미 포화상태이다. 아마도 설천봉으로 오르는 곤돌라덕분에 향적봉 사진은 누구도 찍을 수 있는, 여자들이 힐을 신고 사진을 찍을 수 있는 곳이 되어버렸으니 이 또한 개발우선 정책이 빚어낸 우스운 현실인 것이다.

 

향적봉 정상을 얼마 남기지 않은 곳에 가니 오히려 바람이 잔다. 오히려 포근함 마저 든다. 하지만 향적봉에 오르니 일기는 돌변한다. 서 있기조차 힘든 바람, 냉기를 듬뿍 실은 안개가 산 전체를 싸고돌아 가까이 있는 사람도 분간이 되질 않는다.

바로 중봉쪽을 향하여 내려갔다.등산로에는 이미 적잖은 눈이 쌓여 다져지고 옆으로는 허리춤 높이의 눈이 쌓여 약간의 발만 헛디뎌도 허벅지 까지 빠지는 사태가 발생한다. 향적봉대피소 화장실만 잠깐 들려서 다시 중봉을 향한다.

여름에 삿갓재대피소에서 1박하고 무룡산, 동엽령, 중봉, 향적봉, 설천봉으로 하산했는데 이번은 설천봉을거쳐 향적봉, 중봉, 동엽령을 거쳐 안성으로 하산하는 코스이다.

중봉으로가는 코스는 주목과 구상나무 군락지이다. 이곳에도 추위와 싸우며 국립공원 관리공단 직원들이 지키고 있다.  하긴 잠깐 한눈을 팔면 어느새 등산로를 이탈해 사진을 찍고 있으니 감시의 눈길을 펼칠 수 밖에.........

간간히 보이는 커더란 주목나무들은 시루떡 같은 눈을 서너 말씩 머리에 이고 한겨울 삭풍에도 꿋꿋하게 버티고 있다. 그 밑의 이름 모를 관목들도 습한 바람의 흔적을 하얗게 매달고 세찬 바람에 맞서고 있었다.해는 나올 기미가 없다.

바람이 더욱 세차서 보니 중봉이다.  맑았으면 저 아래로 죽 평전이 이어지는 길 일 것인데 하얀 안개만이 불확실한 새대를 살아가는 우리네 마음같이 두껍게 내리 눌러 두렵기만 하다. 이내 아래로 발길을 옮긴다. 거센 바람에 중심을 잃은 몸뚱아리는 이리저리 흔들린다. 이미 콧물은 나오며 이내 얼어붙어 인중에서 버석이고 입을 떠난 입김은 바로 성애로 변해 머플러에 그대로 붙어 버려 꼭 마른 가죽을 목에 두르고 가는 것 같았다.

여름 같으면 노란 원추리들이 군락을 이루고 간간히 동자꽃들이 그 사이에서 자태를 뽐냈으련만 지금은 은색 설원만이 그 깊이를 감춘 채 수북수북 쌓여 산객들의 발목을 잡곤 한다. 이곳부터는 너무 추워서인지 등산로의 눈도 다져지지 않아 밟으면 죽죽 미끌어지기 일쑤이다.

 

평전을 지나 백암봉(1,503)을 넘고 다시 잡목사이로 가니 바람이 간간히 일어 잠들어 잇던 나무 비늘들을 털어 낸다. 그 비늘들은 어느새 눈가루로 변해 눈은 오지 않는데 하연 눈이 내린다. 점심 때가 다가 오니 말 수도 적어진다. 간간히 “야!” 하는 탄성 뿐.................마지막 동엽령이 지척이다.

반대편에서 한무리의 등산객이 오길래 어렵사리 길을 비키고 서서 길을 내 줬다. 그런데 지나가다 말고 서서 쉰다. 난 어렵게 길을 내주고 비탈에서 서 있는데....무슨 개념이 그리 없는지. 화가 나서 한마디 하니 다시 진행을 한다. 나무 터널을 빠져 나가니 시야가 트인다. 동엽령(1,320)이다.

 

안성방향에서 무시무시한 습이 올라온다. 그 습은 올라 오면서 안개로 변해 무수무시한 속도로 동엽령을 넘는다. 점심을 해결 하려 했던 곳인데 데크 부분에 사람이 들어차 그냥 안성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칠연계곡으로 향하는 길은 급경사라 내리막에 조심해야 한다.

특히 눈이 뭉쳐지지 않을 정도의 추위가 계속 되었는지 등산로의 눈도 다져지지 않아 아이젠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죽죽 미끌어진다. 급기야는 앞으로 미끌어 지는 사태가 발생했다.

 

좀 더 내려가 주목나무 밑에서 점심을 해결했다.그리고 뜨거운 커피 한잔을 마시니 목을 너머서 식도를 타고 내려가는 쾌감에 더 이상 부러울 게 없다. 좀 쉬다가 다시 길을 나선다.

그리하여 도착한 안성 탐방지원센터, 겨울임에도 하산 할 등산객을 맞이하러 온 버스가 가득하다. 리조트로 되돌아오면서 차창너머로 멀리 올려다 본 향적봉에 햇살이 비치기 시작한다. 무겁게 눈꺼풀이 내려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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