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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백과 진달래를 따라 떠난 강진(1일차)

  • 입력 2013.04.30 09:14
  • 기자명 유형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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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이 진다. 봉오리째 툭툭 떨어진다. ‘자의식’이 강한 꽃이지 싶다. 가지 끝에서 하루하루 시들 바에는 차라리 떨어져 아름다운 모습 그대로 남겠단다. 그 결기를 품고 낙화한다. ‘떠나는 모습이 아름다운 나무’, 동백이다. 어느 일간지에서 읽은 글이다.그런 동백이 지천인 제주에서는 옛날엔 선비집 뜰 안에 동백을 심지 않았단다. 꽃이 목을 부러뜨려 툭하고 떨어지는 모습이 유배되어 제주에 기거 하는 자신의 모습을 너무나 꼭 닮아서 그랬다하니 동백의 지는 모습이 얼마나 고결하고 한스러웠는지 알 수 있다.

이즈음엔 그런 동백꽃이 남도지방 이곳저곳에 흩뿌려져 있다. 그 중 으뜸이 전남 강진의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백련사 동백숲이다. 이 흐드러진 꽃을 보러 이번이 세 번째 백련사를 찾았다. 백련사 동백숲은 사람과의 경계를 두지 않는다. 천연기념물이라지만 그 숲에 들어가 사람도 동백이 된다. 물아일체(物我一體)라할까 정신없이 헤메다 보면 어느덧 얼굴에도 발그레 동백이 핀다.

발아래도 동백이 지천이다. 동백꽃은 늘 푸른 잎에 감춰졌을 때보다, 되레 땅 위 떨어졌을 때 더 아름답다는 이들이 많다. 가수 송창식도 노래했다. ‘눈물처럼 후두둑 지는 꽃’이라고. 가지와 땅에 이어 뭇 사람들의 가슴, 얼굴속 속에서도 피어나니 이처럼 생명력이 긴 꽃 또한 없으리라.

강진터미널에 내리니 터미널 안내 아저씨가 눈에 들어 왔다. 3년 전에 왔을 때도 친절히 안내 해 주셨는데 이번도 마찬가지이다. 그분의 안내에 따라 표를 끊고 차에 올랐다. 큰길에서 차를 내려 약1.5km걸어 올라가면 백련사 주차장이 나온다. 주차장에서 보면 길은 두 갈래로 나뉜다. 왼쪽은 비포장의 숲길, 오른쪽은 경내로 직행하는 아스팔트길이다. 동백숲은 터널을 이뤘다.

길 양옆으로 10미터 이내의 동백나무들이 빽빽하게 늘어서 있다. 여기서 백련사까지 거리는 지척, 하지만  허리 숙여 땅을 보면 들꽃 천지다. 보랏빛 현호색, 구슬봉이 등 키 작은 들꽃들이 땅에 떨어진 동백꽃과 어우러져 있다. 비단결처럼 지천으로 땅바닥에 깔린 동백을 피해 오르다 보면 곧 백련사 경내다. 그러나 우린 경내로 직접 가지 않고 다시 좌측 동백터널쪽을 빠져나가 조금 오르면 다산초당 가는 길과 마주치며 그곳으로 조금 더 올라 부도밭으로 향했다.

 부도밭 역시 붉은 융단을 펼쳐 놓은 듯 발을 딛기 어려울 정도로 동백꽃이 땅을 덮어 버렸다. 또 동백고목이 가득 들어차 한낮에도 햇볕이 잘 들이 않아 어둑어둑한 광경을 연출하였다. 백련사 경내로 직접 들어가지 않고 이곳부터 들른 것은 한 무리를 지어 뒤따라 온 아주머니 관광객들이 이곳으로 접어들면 초토화를 시킬 것 같은 우려 아닌 우려 때문이었으리라.꽃밭에 세워진 부도가 어느 분의 부도인지는 알 수 없지만 양지바른 언덕에 있는 부도나 숲 속에 있는 부도나 모두 한 그루의 동백나무처럼 보인다. 그 모습이 담장 속에 답답하게 갇힌 채 오밀조밀하게 모여 있는 이름난 절집의 부도들보다 얼마나 자연스러운지 모른다. 많은 사찰의 부도밭을 가 봤지만 오대산 월정사 부도밭, 미황사 부도밭, 그리고 이 백련사 부도밭이 가장 아름다운 것 같다.우리들 삶은 파란 하늘에 한순간 나타났다 사라지는 한 조각구름처럼, 더운 여름날 잠깐 스쳐 가는 바람결처럼, 한때 붉게 피었다가 어느 순간 땅에 뚝 떨어져 시드는 동백꽃송이처럼 한순간 나타났다 사라지는 것이 우리네 인생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깨달음을 주고 있는 것 같다.조용하던 동백숲이 왁자지껄 술렁인다. 다시 관광객들이 부도밭으로 몰리는 것을 보고 백련사로 향했다. 절집은 수수하다. 단청 다 퇴색되어 벗겨진 대웅전이 정겹고, 응진전과 만경루도 고즈넉하다. 고려 8국사(國師)를 배출한 남도의 명찰이니, 어쩌면 소박한 게 당연한 노릇일 터다. 국내 대다수 절집과 마찬가지로 임진왜란 등 전란 통에 소실되는 비운을 겪고 새로 지어졌다.절집 뒤편의 만덕산이 당장이라도 세상을 집어 삼킬 듯 암릉의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며 내려다보는 것이 어쩜 그리 미황사와 닮았는지 모른다. 또 경내에서 보는 아련한 바다풍경도 그러하니 바닷가 절집을 찾는 이유 중 하나일지 모른다. 또 경내 찻집에 앉아 봄볕 가득한 강진만을 보는 즐거움 또한 추천하고픈 광경인데 배롱나무 꽃피는 계절에 이곳에 앉아 바다를 바라보고자 했었지만 아직 그 호사는 누려 보지 못했으니 아직도 백련사를 가야할 여지를 남겨 놓은 것이리라.경내를 나와 다산초당으로 넘어가는 오솔길로 접어들었다. 이 길은 백련사와 정약용이 기거했던 다산초당을 잇는 조붓한 오솔길이다. 길은 삼남대로를 따라가는 ‘정약용 남도유배길’의 한 구간이기도 하다. 총 4코스(65.7㎞) 가운데 2코스에 해당하는 다산오솔길은 다산초당~백련사 동백숲길~남포마을을 지나 강진 읍내의 영랑생가로 이어진다. 길 초입 안내판은 다산초당까지 거리를 800m, 소요시간은 30분이라 적고 있다. 하지만 800미터의 길이는 사유의 깊이로 따진다면 수십km는 족히 될 것이고 또 30분내에 서둘러 걸을 필요가 없는 만행(漫行)의 길 인 것이다.

다산오솔길의 일반적인 들머리는 다산유물전시관이라며 매표원이 그곳에서 가길 권유했다.그러나 내 추억의 길은 항상 백련사에서 넘었기에 이번에도 백련사에서 넘었다. 7년 전인가 처음 여기를 걸어 넘을 때 초등학교 1학년 어린이와 길동무를 한 적이 있었다. 때는 이른 봄 아직도 매서운 바닷바람이 산허리를 감싸는데 이녀석이 걷다가 서서 손을 귀에다 대고 나를 부른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나무들이 이야기 하는 소리가 들려요.” 나도 손을 대 봤다. “휘익”하고 바람이 나무들 사이를 헤집고 다니는 소리가 들렸다. 자연공부는 따로 시키는게 아니라 애들을 자연에 방생하는 자체가 교육일 것이다.다산은 1808년부터 10여년 동안을 다산초당 등 강진땅 유배생활을 보냈다. 개인적으로는 가장 힘든 나날들이었겠지만, 역설적으로 그의 일생에서 가장 빛났던 시절이기도 했다. 저 유명한 목민심서, 경세유표등 방대한 양의 저술이 모두 다산초당에서 완성됐다니 말이다.정약용은 이 길을 따라 백련사를 오가며 혜장선사와 교분을 나눴다. 혜장은 다산이 유배 생활을 하는 동안 스승이자 제자, 그리고 벗이었다. 다산과 혜장스님이 오갔던 길을 300여년이 지난 이 시절에 걷고 있다.다산초당 주변엔 다산의 흔적이 여태 남아있다. 다산은 초당 동쪽에 동암을 지어 기거했고, 물을 끌어다 인공연못을 만들었다. 텃밭을 일궈 남새도 길렀다한다. 흐트러진 마음을 다잡기 위해 초당 뒤편 바위에 ‘정석’(丁石)이란 글자를 새기기도 했다. 다산은 종종 천일각에 올라 흑산도로 유배 간 형 정약전을 생각하며 시름을 달랬다고 한다.초당에서 내려오는 길은 약간 가파르고 숲이 울창했다. 그러나 우리 발밑을 지탱해준 수없는 나무뿌리, 얽히고설키어 많은 사람들에게 아낌없이 자신의 육신을 내어주어 스스로 계단이 되어준 나무뿌리들이 고맙게 느껴진다. 그래서 정호승시인이 뿌리의 길이라는 시를 쓰지 않았던가.강진은 한정식집이 많다. 유명한 곳으로 설성식당과 수인관이 있는데 너무 읍내와 멀어 몇 년 전에 간 기억으로 만족하고 오늘은 시내 식당에서 간단히 먹고 숙소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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