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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도엔 꽃바람이 분다.

  • 입력 2013.03.19 10:49
  • 기자명 유형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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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면 솟아나는 그리움의 병...

해마다 봄철이 되면 마음 한 자락 웅크리고 있던 그리움이 열병처럼 돋아나고는 한다. 그 때가 되면 달력을 보고 풍도행 배표를 예매를 하며 민박집에 전화를 하는 것으로 그리움의 여행을 시작을 한다.

예전에 타고 갔던 왕경호와는 달리 서해누리호는 선박이 더 커 안정감이 있었다. 배는 순식간에 인천대교를 지나 방아머리 선착장에 도착을 해 그곳에서 몇 사람이 더 타고 출발을 했다. 배 안에는 고향집을 방문하는 부부, 우체 행낭을 들고 가는 젊은처자, 이제 전입을 가는지 더플백을 멘 이등병의 불안한 눈초리, 여행을 하는지 한무리 아주머니들의 왁자한 고스톱 놀이, 출사를 가는 사진사들, 이 각각 사연을 싣고 약 1시간여 후에 풍도에 도착을 했다. 풍도는 이번이 4번째 방문이니 어쩌면 고향의 품에 안긴 것처럼 아늑함이 가슴 가득 자리했다. 풍도분교, 조그만 교회, 초인종을 눌러야지 집에서 나오셔서 가게 문을 여는 슈퍼, 민박집들, 건너편으로 보이는 사랑방 같은 파출소, 이 모든 것들이 작년에 일기가 고르지 못해서 방문을 포기해서인지 어서 보라는 듯이 일순간에 내 눈 안으로 밀려온다.민박집을 들어서니 주인아주머니가 반겼다. 하지만 2년만에 뵌 모습은 더 늙으신 모습이라 반가움보다 아쉬움이 더 크게 자리했다. 어느 방이냐고 물을 것도 없이 으례히 그랬듯 바닷가로 창이 난 방에 짐을 풀었다. 매년 이방에서 묵었으니 이방 또한 내방마냥 익숙하다.주인아주머니께 폐를 끼칠까봐 컵라면으로 점심을 때우는데 아주머님께서 김치와 밥, 그리고 사생이 나물을 한 접시 놓고 가셨다. “감사 합니다” 그 한마디와 동시에 나물 한 젓가락을 입에 넣고 씹으니 쌉싸름한 온봄 산천의 맛이 입안에 확 퍼진다. 아마 그 맛에 사생이 나물을 또 그리워했는지도 모른다.

다시 산으로

짐 정리를 하고 뒷산으로 올랐다. 동네를 빠져나갈 무렵 백구 한 마리가 꼬리를 흔든다. 그 백구도 한 4년전부터 보았는데 이제는 늙었는지 비척하게 마른 모습이 세월의 무상함을 새삼 느꼈다. 다시 오르니 바다가 한눈에 들어온다. 앞의 난지도, 육도와 당진쪽의 장고항쪽의 모습도 아련하게 보인다. 위로는 500년이 넘었다는 은행나무가 마을을 굽어보고 있다. 대개의 사람들을 은행나무가 한 그루 있는 것으로 아는데, 그 나무의 좌측으로 난 길을 따라가다 보면 또 한그루의 수령500년이 넘었다는 은행나무가 온 섬을 다 덮을 기세로 당당하게 서있다.그러나 그 나무들은 항상 그대로인데 그 나무를 바라보는 우리는 매년 해가 다르게 늙어가고 있으니 만물 중에 가장 진화한 영장류의 인간도 자연 앞에서는 무릇 미물에 지나지 않으니 내 잘났다고 어디 가서 뽐낼 것도 아니오, 또 뽐내는 것 또한 꼴불견이리라.풍도는 행정구역상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풍도동에 속한다. 섬 주변에 수산자원이 풍부해서 풍도라 부르게 되었다고 하며 전형적인 섬마을이다. 밭이라고 해야 비탈면에 손바닥만 한 것들이 대부분인 데다 고추나 상추, 콩 따위를 심어 기르는 정도다. 그러니 민박집 주인들도 관광객이 뜸할 때면 인천 등으로 생활 본거지를 옮겨 생활하시는 분들이 많으신 것 같다.봄이면 노란복수초가 무리지어 피어나고, 노루귀, 변산바람꽃, 꿩의바람꽃, 대극, 중의무릇까지봄 야생화가 지천으로 피어나 풍도. 즉 풍요로울 풍(豊)자를 쓰는 섬(島)이다. 하지만 애초에 단풍나무 풍(楓)자를 썼다는데, 일제시대 때 지금의 이름을 갖게 되었다한다. 첫 해 방문때 혼자 깊숙이 산으로 올라 서쪽 채석장이 위치한 절벽부근으로 갔었는데 그 때 무수히 많은 단풍나무를 보았었다. 그래서인지 풍도(楓島)라 해도 전혀 어색하지 않을 것 같다.

 4시가 넘으니 부산하던 산판이 일순 정적에 잠긴다. 아침에 낚시배로 들어와 사진을 찍던 사람들이 썰물 빠지듯 빠져나간 것이다. 언젠가 풍도 주민 분들이 하시는 얘기를 배안에서 들었던 기억이 난다. 낚시배를 빌려 사진만 찍고 가는 사람들은 풍도에 하나도 도움이 안된다 하시던 푸념이... 빛이 기울어질 무렵 아래로 내려와 일몰을 보러 가려고 길을 나섰다. 하지만 그 좁은 섬에도 무슨 개발의 바람이 밀렸는지 도로 포장 공사를 하느라 길을 막아놓았다. 옛날 비포장 도로였을 때가 더 운치가 있었는데..... 저녁 아주머니께서 끓여주신 김치찌개에 사생이나물, 그리고 달래나물로 배를 두둑하게 채운 뒤 그 자리에서 여행 온 일행들과 맥주 한캔씩 앞에 놓고 늦도록(?) 여행에 관한 지식들을 쏟아 놓고 너무 시간이 많이 지난 것 같아 닦고 자리에 누우니 저녁8시.......끼룩,끼룩 갈매기 소리가 창 너머로 넘어와 피곤에 지친 나를 흔들었다. 새벽5시, 집에 있으면 당연히 일어났을 시간인데 긴장이 풀려서인지 이 시간까지 계속 잠을 잔 것이다. 창을 여니 상큼한 바다 공기가 가슴 깊숙하게 파고들었다. 먼 바다는 지척이 구분 안 될 정도로 해무가 뒤덮었다. 현관을 나가 바닷가로 가니 밀물로 만조가 되어있었다. 오늘은 일출도 못 보겠구나. 머리를 감고 나와 다시 창밖을 보니 안개가 많이 걷혔다. 얼른 카메라를 들고 현관으로 나서니 붉은 기운이 솟아오른다. 하지만 이미 해는 올라 안개 속에 있었다. 안개가 사라지며 서서히 윤곽을 드러낸 태양, 부끄러운 초면의 낯을 내게 보이고 배시시 웃는다.아침을 먹고 대극을 찾아 다시 산을 넘었다. 2년전 기억을 더듬으며 찾아 나선 곳 그 계곡에서 달랑 2촉의 대극과 조우하고 다시 넘어와 사진을 찍고 내려오는데 한 무리의 사람들이 몰려있다. 이런, 아침내 산까지 넘어 찾은 대극이 이곳에는 지천이다. 그것도 산 초입에 말이다. 열심히 대극을 촬영하고 내려가는 길, 마을을 포근히 감싸 안은 포구엔 이른 봄볕이 내리고 있었다.또 다른 이별....

같은 숙소에서 묵은 일행들은 하루밤새 한 식구처럼 친해졌다. 내년 이맘 때 쯤 다시와 고기 파티를 하기로 약속을 하고 배낭을 메고 다시 긴 이별에 나섰다. 마치 시골 시는 형수님처럼 포근한 민박집 아주머니도 길을 따라나오셔서 손에 비닐봉지를 들려 주셨다. 봉지에는 사생이나물과 함께 아주머니의 그득한 사랑과 정이 담겨있었다. 나는  말은 하지 않았지만 내년에도 여기 그 자리에 있어달라는 부탁을 마음속으로 드리며 배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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