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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끝마을 맴섬일출.

  • 입력 2013.02.19 11:54
  • 기자명 유형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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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끝 선착장 앞에 자리한 두 개의 섬인 맴섬 사이로 해가 뜨는 맴섬 일출은 1년에 두차례 조망이 가능한데 매년 2월과 10월, 일 년에 두 차례 연출되는 장엄하면서도 아름다운 광경으로 인해 전국의 사진 동호인들의 발길을 모으고 있다. 시기는 대략 2월14일부터 18일까지 5일 가량 볼 수 있으며, 섬 사이 정중앙의 장관은 15일과 16일, 17일이 된다. 10월에는 24일부터 27일까지 일출 장관을 볼 수 있다.몇일 전부터 일기예보를 눈여겨 보다가 토요일날씨를 확인하고 해남행 차에 몸을 실었다. 자다 깨다를 반복 도착하니 새벽2시. 그러나 현실은 암담했다. 이미 수십개의 카메라 삼각대가 자리를 하고 있었다. 다행하게 일산에서 왔다하니 그 먼곳에서 오셨으면 사진 한컷은 찍고 가야지 하시며 의자까지 공수해다 올라가 찍으라고 블록까지 주워다 올려 주셨다.

아직까지 인정이 살아있음을 스스로 느끼며 여름용 침낭으로 몸을 감싸고 기다리는데 갑자기 뒤가 수선스럽다. KBS 2TV 생생정보통 촬영을 나왔단다. 하지만 그 사람들도 좋은자리를 이미 전날 온 사진사들에게 빼앗기고 스스로 평상을 구해 우리 뒤편에 자리를 마련했다. 자세히 보니 '미스터 LEE의 사진한컷 대한민국'이라는 코너의 미스터 LEE도 눈에 보였다. 그리고 인터뷰도 2번했는데 편집이 될지 모르겠다.(실은 방송일 에 보니 동행인의 인터뷰만으로 난 교묘하게 편집됨)찬바람과 맞서 싸우기 2시간, 4시가 지나니 슬슬 사람들이 몰려온다. 5시쯤 되니 이미 자리가 꽉차고 슬슬 여기저기서 자리싸움이 시작되었다. 그때 누가 ‘커피 드실분!’ 하며 소리를 질렀다. 자기를 땅끝마을 부녀회장이라며 그 와중에 계속 커피를 타다 나르셨다. 춥다기 보다도 속부터 떨려오던 속에 뜨거운 커피를 넣으니 사르르 전신이 녹아내렸다.

6시쯤되니 일반관광객들 몰려들어와 더 혼잡을 느끼기 시작했고 급기야는 고성이 난무했다. 동쪽으로는 부옇게 동이터오고 수평선이 서서히 드러났다. 7시가 넘으니 수평선위로 발그래 물이 들기 시작했다. 순간 찬물을 끼얹은 듯 정적이 흐르며 찰칵거리는 셧터음만이 바닷가의 정적을 깨웠다. 멀리 보이는 수평선 끝머리가 둥그렇게 보이는 것 보니 오늘일출이 깔끔하게 올라 올 것이라는 것을 알게 해준다.7시25분, 잡자기 붉은 기운 가운데 밝은 불덩이 같은 것이 머리를 내밀었다. 일출은 갑작스럽게 시작된다. 잡가기 일순 고요한 정적이 흐르다 이내 탄성으로 바뀌었다. 잘 유지되던 질서도 순식간에 무너져 내렸다. 그렇게 일순간에 해는 떠올랐고 사진사들이 슬슬 자리를 뜨기 시작했다. 무너진 질서의 현장만이 초라하게 그리고 어지럽게 소리없는 절규를 하고있었다. ‘사진을 찍기전에 도덕성부터 키우세요!’ 라고...그곳을 떠나 미황사로 발을 옮겼다. 전부터 차로 편하게, 배불리 먹고 편히 자는 여행은 지양해오던 터라 아침 이른시간이지만 달마산 자락의 미황사를 찾았다. 이번이 미황사는 3번째 방문이다. 해남을 땅끝이라서 여행의 끝으로만 알고 달려온 여행객은 땅끝 십 리 못미쳐 동쪽에 자리 잡은 달마산(489m)을 그냥 지나치곤 한다. 달마산은 한반도의 산줄기가 바다로 떨어지기 직전, 마지막으로 솟아오른 봉우리다.

 달마는 산스크리트어 다르마(Dharma)에서 왔다. ‘진리’라는 뜻이다. 달마산 아래 아름다운 고찰, 미황사(美黃寺)가 자리한다. 절 아래 마을 서정리에서 올려다보면 짙은 녹음을 발산하는 동백나무와 소나무 숲 사이로 대웅보전의 잿빛 지붕이 한 점 구름처럼 살포시 떠 있다. 보는 이의 눈매를 선하게 만드는 풍경이다.

1200여 년 전부터 내려오는 미황사의 전설은 사뭇 신비롭다. 숙종 18년(1692년)에 세웠다는 부도암 사적비에 전설은 이렇게 기록돼 있다. -신라 경덕왕 8년(749년)에 돌로 만든 배가 사자포구에 닿았다. 그곳에는 금인(金人)이 노를 잡고, 배 안에는 화엄경, 법화경, 비로자나 문수보살, 탱화 등이 있었다. 향도들이 모여 봉안할 장소를 의논할 때 갑자기 검은 소 한 마리가 나타났다. 금인이 말하기를 ‘나는 본래 우전국의 왕으로 경상(經像·불경과 불상)을 모실 곳을 찾다 이 산에 일만 불(佛)이 있어 여기에 배를 세웠다. 소에 경을 싣고 나가 소가 누워 일어나지 않는 곳에 봉안하라’-. 미황사 이름 또한 설화에서 유래한다. 미(美)자는 소의 ‘음매’ 하는 소리에서 따왔으며, 황(黃)자는 금인의 색을 뜻한다고 한다.

햇살이 퍼지는 미황사 가는 길은 푸르름이 가득하다. 이제 막 불거져 나오는 동백이 필 때쯤이면 아마 미황사 가는 길은 붉은 옷으로 갈아입을 듯 하지만 두 번 다 여름에 다녀갔고, 이번은 겨울 막바지이니 아직 꽃은 보지 못했다.

멀리 뒷산인 달마산이 실루엣으로 보인다. 올 때 마다 느끼지만 저산을 언제 종주했으면 하는 맘이 굴뚝처럼 밀려온다. 이번 가을쯤 한번 계획을 해야겠다. 이런저런 생각을하며 미황사에 다다랐다. 산사는 아직은 깊은 정적에 잠겨 고즈넉하게 산자락의 그늘에 감쌓여 있어 이제 막 기지개를 펴는 듯했다.마당에 오르니 단아하지만 화려한 대웅전이 눈에 들어왔다. 그러나 대웅전이 보수 중이라 그 내부는 볼 수 없었다. 아직 밝음이 채 자리하기 전의 대웅전의 앞을 지나 또 하나의 보물인 응진당으로 행했다. 지난 여행 때 수국이 화려하게 핀 이 자리에 서서 해남 앞바다를 바라보던 기억이 봇물처럼 밀려들었다. 다시 대웅전 앞마당을 걸어 나와 찻집 앞을 지났다.4년전 그러니까 2009년 7월 비오는 날 찻집에서 하염없이 떨어지는 빗방울을 바라보다 우산을 받치고 부도밭을 갔었다. 비오는 날 우산에 떨어지는 빗소리가 너무 상쾌해 하염없이 걷고 싶었는데 워낙 많은 비가 쏱아져 처마밑으로 피해있다가 비가 잦아들자 다시 부도밭을 돌러보고 나왔던 기억이 새록새록하다.조선 숙종 때 민암(閔黯, 1636~1694)이 쓴 미황사 사적비가 부도암 부도밭 앞에 있고 이 사적비 바로 곁에 남부도밭이 있다. 부도암이 있는 이곳은 옛 통교사터이기도 하다. 남부도밭에는 송암당, 영월당, 설송당 등 선사의 이름이 새겨진 부도와 부도비가 모두 그만그만하게 서 있다. 미황사 부도밭이라고 하면 보통 이 부도밭을 말한단다. 남부도밭의 규모를 보면 지금의 미황사와는 비교되지 않을 만큼 한때 사세가 대단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전하는 이야기에 의하면, 미황사는 150년 전 중창불사를 위해 주지 흔허 이하 40여 명의 스님이 군고(농악)단을 이끌고 완도에서 청산도를 향하다 바다에서 폭풍을 만나 거의 모두가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그 일로 절은 거의 폐사가 되었다고 하는데, 이 이야기를 뒷받침하듯 부도도 그 이후의 것은 없다.오늘은 절만 뒤돌아보고 나오며 다짐을 한다. 달마산을 종주해 보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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