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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백산 설경에 흠벅..

  • 입력 2013.01.21 19:29
  • 기자명 유형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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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철 추위가 한창 일 즈음이면 유독 많은 사람들이 찾는 산들이 있다. 아마 덕유산과 태백산일 것이다. 그 중 한곳인 태백산을 등반하기로 계획한 건 2주전, 그리고 그 계획을 실천하러 지난주 태백산에 올라 아침을 맞았다. 한반도에서 기승을 부리던 혹독한 추위가 슬그머니 자취를 감출무렵 선자령을 다녀오고 태백으로 이동, 이튿날 새벽 태백산에 오른 것이다.헉헉대며 죽죽미끌어지는 눈길을 따라 올라 유일사 갈림길을 지나니 갑자기 등산로가 좁아지고 경사는 가팔라진다. 어느 곳이 등산로인지 구분이 가지 않고 그저 먼저 지나간 사람들이 밟고 지나간 사람들의 발자국을 그대로 따라 한걸음, 한걸음 길을 재촉했다. 추운 날 임에도 머리에선 땀이 흐른다.

깊은 산 속에선 유독 별이 선명하게 빛난다. 헤드 랜턴의 불빛 아래로 하얀 길이 사라졌다간 이내 또 나타난다. 거친 숨소리가 저벅거리는 발소리에 묻혀 골짜기로 숨어버리고 대신 하얗게 품어내는 입김만이 눈앞에 어른거리다 슬그머니 자취를 감춘다. 오전 4시40분, 영하 13도, 날씨를 인터넷으로 검색하니 구름 한 점 없이 맑음으로 예보되어있다. 아침습도 60%, 풍속 1m/sec, 이른 새벽이지만 산행에 나서 줄을 지어 올라간다.

 새벽녘의 북두칠성은 더 선명하게 빛나 외로운 산꾼들의 동무가 되어 같이 길을 나서고 그곳을 무심히 바라보던 그곳엔 별똥별이 사선을 그리며 떨어진다. 별똥별이 떨어지면 어느 한사람의 목숨이 같이 떨어진다는데 이 새벽 어느 곳에선 이름모를 사람이 세상과 인연의 끈을 놓겠지............다시 돌아서 앉아 숨을고른다. 새벽에 끓여온 차한잔이 가슴을 타고 흘러 뜨거운 기운이 전신으로 퍼져 나간다.장군봉까지 1㎞ 가량 남았다는 표지판을 지나치고 거친 숨소리만 숲의 정적에 스며 사라진다. 무심히 발밑만 보고 걷는데 가파른 경사가 완만해지며 어두운 길가로 갑자기 덩치 큰 사람이 가로 막는다. 헤드렌턴을 들어 보니 주목이 팔을 벌리고 서 있다. 주목 군락지이다. 어둠도 서서히 여명에 자리를 내 주고 있다. 여기저기에 자리한 숲의 정령들이 제각각 모습을 뽐내듯 주목들이 서서히 실루엣을 연출하며 남은 어둠을 몰아내고 있었다.출발한 지 한 시간 남짓. 동남쪽 하늘에 새벽빛이 들기 시작했다. 정상을 목표로 삼은 이들의 걸음이 빨라졌다. 그들을 좇지 않고 둥치 굵은 나무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갔다. 유일사에서 장군봉 오르는 길, 등산로에서 조금 벗어난 커다란 주목 속으로 머리를 들이밀었다. 미명 속에 잎을 떨구고 선 고목이 산 것인지 죽은 것인지 구별되지 않았다. 그 거친 나뭇가지 사이로 아침이 왔다. 거무퇴퇴한 무채색의 하늘을 군청색으로 밀어 올린 뒤, 아침은 서서히 주홍 빛깔로 서서히 얼굴을 드러냈다. 반대편 하늘엔 아직 별이 또렷했다. 하늘을 가득 채운 색의 잔치는 20여분 계속됐다. 그 잔치에 참여한 것만으로도 산행의 보람이 넉넉했다.

산에 오를수록 기온은 내려갔지만 바람이 거의 없어, 산행하기 힘든 날씨는 아니었다. 해가 오르자 눈을 덮어 쓴 산골과 산마루, 마른 몸으로 겨울을 버티고 있는 나무들이 윤곽을 드러냈다. 태백산은 습기 먹은 동해의 바람 덕에 아름다운 상고대를 자주 볼 수 있는 곳이다. 이날은 많이 춥지 않고 습도가 낮아 상고대는 피지 않았다. 안개 속에 눈꽃 핀 날 태백산에 올라 있으면 온 세상이 통째로 얼어붙은 듯한 착각에 빠지게 된다. 온갖 나무가 순백색 바늘잎을 피우는 아찔한 설경은 2월까지 계속된다고 한다.

우리는 하루에도 수 만 번 표정이 바뀐다. 생노병사와 희노애락을 온몸으로 떠안고 살기에 그런 것 같다. 하지만 생사의 표정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침묵하고 있던 진정한 나무는 주목이었다. 태백산은 보호수종으로 지정된 주목이 군락을 이루고 있는 곳이다. 이 나무는 수명이 매우 길다. 수천년 발아래 세상의 변화를 다 내려다보았을 주목은 이젠 모든 것을 비워낸 채로 또 다른 생을 준비하고 있었다.

태백산 노거수 주목은 대체로 속이 비어있다. 그러나 주목에 비해 찰나의 생을 살아가는 인간들은 자신들의 욕망을 그 나무에 채워 시멘트로 볼썽사납게 쳐 발라놓았다. 나무의 사정을 고려하지 않은, 나무입장에서 한 번도 생각 해 보지 않은 그런 비릿한 오욕칠정으로 꽉 찬 인간 앞에서 주목의 자태는 오히려 태연해 보였다.

오래 전 썩어 파여진 나무의 몸뚱이 빈 곳으로 파란 하늘이 보였다. 나이테가 있어야 할 둥치에 허공이 들어 있는 것이어서, 이 나무에게 천 년은 기록될 시간이 아니라 그저 흘러가버릴 바람과 같겠다는 생각이 들었다.일출이 시작 되었다. 밝고 화려한 색의 잔치를 끝내고 군청색으로 물들었던 하늘은 다시 밝은 오렌지색으로 빛나며, 그 밑에 깔린 얕은 구름층이 용광로의 불빛이 타오르듯 시뻘겋게 물이 들기 시작하더니 갑자기 불기둥이 쑥 머리를 내밀었다. 드디어 잠자던 삼라만상이 일제히 깨어나며 기지개를 켜고 온 세상을 지배했던 어둠이 일순간에 뒷걸음질 친다. 장엄하다.일출이 베풀어준 아침 향연을 만끽하고 흥분을 가라앉히고 장군봉으로 올랐다. 그곳에서 해맞이를 한 사람들도 흥분에 겨워 새해덕담을 주고받고 있었다. 해가 뜨니 갑자기 까마귀 떼가 날아오른다. 그에 따라 내 몸의 흥분지수도 덩달아 날아오른다. 겨울산의 매력을 한 껏 느끼고 다시 천제단으로 발을 옮겼다.산 아래로는 산맥의 뼈대가 그대로 노출되었고 옆으로 가시처럼 뻗은 지맥은 잔근육을 그대로 노출해 아침 해를 온몸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되돌아보니 함백산에도 빛이 내리고 잇었다.태백산은 <삼국유사>에 단군의 아버지인 환웅이 하늘에서 내려와 터를 잡은 곳으로 기록돼 있다. 일연이 몽골군의 말발굽을 피해 숨어서 <삼국유사>를 쓴 건 13세기의 일. 3,500여년 저쪽의 신시(神市)의 기억을 글로 남긴 까닭을 일연은 <삼국유사>에 밝히지 않았다. 여하튼 그로 인해 태백산은 민족의 영산 대접을 받는다. 태백산엔 제단이 셋 있다. 그 중 정상에 위치한 천제단은 적석으로 쌓은 신역(神域)으로 신라 때부터 제사를 지낸 기록이 남아 있다. 이곳에서 바라보는 백두대간의 운해는 눈꽃과 함께 겨울 태백산을 대표하는 이미지다. 일망무제. 신시가 진짜 이곳이라면 환웅의 시대는 분명 거대한 스케일을 지녔을 것이다.천제단을 돌아 이제는 장군봉을 거쳐 하산 길이다. 물론 일반적으로 당골로 하산 코스를 잡는데 우린 유일사매표소에 차량을 주차해 원점회귀 산행을 하기로 했다. 등산시에는 새벽이라 보지 못했던 것을 하산시에 보니 또 다른 매력이다.집으로 돌아와 현업에 복귀하고 1주일여가 지나니 영동 폭설소식이 뉴스를 점령한다. 이 기회에 설악산이나 다시 갈까? 또 이리저리 고민을 하니 이 겨울이여 어서 지나가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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